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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용도 '팩트체크', 금남의 벽 넘는다

방송 기자에서 미용전문가 변신 취재경쟁에 염증…미국행 선택 가든그로브서 스킨케어샵 인수 "방송서도 안 떨다 손님 앞 당황" 남성이라 동성연애자로 오해도 팩트 취재하듯 철저히 고객 관리 지역 언론들 "숨겨진 보석" 극찬 "기자님은 주름이 생기는 편은 아닌데 기미가 올라오려고 하네요. 매일 아침에 동전크기만큼 선크림을 듬뿍 바르세요." 키 181센티미터, 운동으로 다져진 단단한 몸. 언뜻 보기에 헬스트레이너인가 싶지만 그는 5년차 피부관리사다. 한국에서 8년간 경제 전문 기자를 하다 몇 해 전 미국으로 이주했다. 직업탐사 다섯 번째 주인공은 가든 그로브에서 '오아시스 스킨 클리닉'을 운영하고 있는 권준(36)씨다. 권씨는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한국경제TV, SBS CNBC에서 8년간 방송기자로 일했다. 주로 대기업, 자동차, 증권 분야를 취재했고 박근혜 대통령 인수위원회 취재팀에 파견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독한 취재 경쟁에 늘 지쳤다. 아침 7시 출입처에 출근해 밤 8~9시까지 일하는 날이 허다했다. 거절할 수 없는 술자리도 그를 녹초로 만들었다. 스트레스로 몸이 붓고 피부에도 이상이 왔다. 힘들 때마다 찾은 곳이 피부 관리실이었다. "천국 같았어요. 피부 관리를 받으면 쌓였던 스트레스가 말끔히 날아갔죠. 그때 막연히 장차 사업을 하면 저렇게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구나 생각했죠." 그는 피부가 예민해 학생 때부터 화장품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한국에서 판매하는 화장품 중 안 써본 것이 없을 정도였다. 친구들이 유별나다고 핀잔을 줬지만 그는 깨끗해지는 피부에 스스로 만족했다. "피부미용은 이제 사회생활이나 비즈니스는 물론 대인관계, 자기계발에 반드시 필요해요. 남자들은 미용에 관심을 안 가지는 게 미덕이라고 생각하는데 인식을 바꿔야합니다." 기자 생활에 염증을 느낄 무렵, 그는 꿈꾸던 아메리칸드림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마침 친척이 살고 있는 오렌지카운티 가든 그로브에 스킨케어샵이 매물로 나왔다. 그는 과감히 한국 생활을 접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생애 첫 사업이었다. 세일즈는 1분 30초의 뉴스 리포팅보다 훨씬 어려웠다. 매순간이 라이브였다. 손님을 응대하는 것부터 화장품을 설명하는 것까지 모든 것들이 낯설었다. 손님 앞에서 손까지 덜덜 떨었다. "카메라 앞에서도 안 떨던 제가 손님 앞에서는 어찌할 줄을 모르겠더라고요. 돌이켜보니 화장품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게 문제였어요." 적자인 피부 관리실도 정상 괘도에 올려놓아야 했다. 사업자로부터 인수받은 고객장부와 회계장부는 엉망이었다. 새벽 4시에 출근해 밤늦게까지 산더미처럼 쌓인 고객명단을 분류하고 회계정리를 했다. "가격 정책과 서비스 규정도 새로 만들어야 했어요. 그러니 기존 손님들이 빠져나가는 거예요. '이러다 망하는 것 아닌가' 밤잠을 설쳤죠." 때로는 손님 때문에 곤혹스러울 때가 있었다. 종종 원가에도 못미치는 가격으로 깎아달라는 손님이 있었고 화장품을 아끼려고 조금만 바르고는 효과가 없다고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전히 금남의 세계인 미용계에서 동성애자로 괜한 오해를 받기도 했다. "고객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요. 하지만 서비스를 받고도 되레 선심을 쓰고 간다는 듯한 태도를 보일 때 불편하기도 하죠." 피부 관리실에서 여성 직원 두 명은 주로 피부 관리를 맡고 권씨는 경락 마시지를 한다.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보통 손님당 20~30분, 기계 마사지까지 더하면 50분을 넘는다. "마사지사의 기운이 손님에게 그대로 전해집니다. 때문에 마사지사가 건강해야죠.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꾸준히 몸을 관리하는 이유에요." 여성 직원은 손에 냄새가 밸 수 있어 부엌에서 절대 맨손으로 김치나 양파 등 만지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그는 전문성에 방점을 뒀다. 미용 관련 기사와 잡지를 빠지지 않고 읽고 세미나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전문지식을 쌓았다. '감각'이 아니라 과학을 기반으로 한 '팩트'로 미용에 접근했다. "보통 피부 관리사들은 자기 피부를 기준으로 화장품의 성능을 판단하거든요. 저는 달라요. 화장품에 어떤 성분이 함유돼 있는지 확인하고 손님들의 피부에 맞게 안내하죠." 개업 3년 만에 입소문을 타고 있다. 리뷰 사이트 옐프(Yelp)는 올 초 권씨의 가게를 '고객이 선정한 인기 업체'로 꼽았다. 지역 매거진에서도 '숨은 보석'이라고 권씨와 업소를 보도했다. 연방노동부는 피부 관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2014년부터 10년간 피부관리사 업종이 12%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다른 직업 평균인 7%보다 배 가까이 높다. 지난해 한 해 평균 임금은 3만270달러. 스킨케어전문가협회(ASCP) 조사에 따르면 부유층을 상대로 한 전문가들은 연 10만 달러의 고소득을 올린다. "적절한 가격에 얼마나 손님들을 만족시켜드리느냐가 성공 열쇠에요. 계속 연구해 봐야죠. 저의 꿈은요? 피부 관리실과 헬스클럽, 웰빙 음식점을 아우르는 웰빙센터를 만드는 겁니다." 황상호 기자 hwang.sangho@koreadaily.com

2017-09-06

'텍사스 또순이'에서 부동산 해결사로

365일 휴일 없이 매달려 비서·청소원·운전사 자처 '연소득 10만 달러' 스타덤 16세 때 텍사스로 가족이민 시장서 보석팔며 장사배워 개인 사업 접고 중개인 도전 '모델하우스'식 판매로 성공 "띵~띵~." 인터뷰 중에도 스마트폰으로 손님들의 메시지가 계속 왔다. 사무실 책상 위에는 거래 중인 서류들이 가득했다. "손님들 질문에 답하고 서류 작성하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겠어요. 일이 쉬워 보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요." 올해로 10년차 부동산 중개인이 된 임현(49)씨. 스스로 '일중독자'라고 했다. 매일 아침 7시에 사무실로 출근해 새벽 1~2시가 돼서야 퇴근한다. 365일 쉬지 않고 일한다. 손님 일정이 우선이라 주말도 없다. 때로는 공항까지 손님 픽업도 나간다. 철저한 직업 정신 덕분에 임씨는 매년 최소 10만 달러를 버는 '스타 중개인'으로 성공했다. 한 달 평균 2~3건 이상의 부동산 거래를 통해 많게는 20~30만 달러까지 번다고 했다. 누구나 그렇듯 지금의 성공은 과거의 고생에 대한 보답이다. 그녀의 중개인 지론은 단순히 부동산 거래 한 건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챙겨야 한다는 것이다.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서 고객들에게 상담사, 청소원, 비서, 운전기사 등 일인다역을 마다하지 않았다. "손님이 손님을 연결해주거든요. 필요하다면 영어에 서툰 손님들의 개인 우편물까지 통역해줘야 해요. 무엇보다 신뢰가 중요한 직업이죠." 돌아보면 어린 시절부터 장사 수완이 좋았다. 서울 미아리에서 자란 그녀는 10살이 되던 1978년 텍사스 포트워스로 부모, 오빠 둘과 함께 이민왔다. 화려한 색을 좋아한 막내딸은 주말이면 부모를 따라 벼룩시장에 갔다. 부모는 도매시장에서 귀걸이며 팔찌 등 저가 액세서리를 시장에서 팔았다. 옆에서 장사를 돕던 그녀는 부모에게 '당찬 사업 제안'을 했다. 고가 액세서리를 팔아보자고 했다. 당시만 해도 100달러짜리면 백화점에서나 파는 물건이었다. 아버지는 "시장에서 누가 그런 걸 사냐"고 잘라말했다. 하지만 임씨는 밀어붙였다. 감각은 통했다. "학교를 마치면 현금 몇천 달러씩을 들고 혼자 도매시장으로 갔어요. 팔릴만한 물건을 골라 주말에 시장에 나가 되팔았죠. 물건이 없어 못팔 정도로 백인들에게 반응이 좋았어요." 좌판 생활 3년 만에 가족은 백화점으로 진출해 가구점을 열었다. 아버지는 계약서를 쓸 때마다 딸을 데리고 다녔다. 임씨는 통역사 역할을 하며 부동산 가격도 흥정했다. 일을 똑 부러지게 하는 임씨를 가족들은 '또순이'라 불렀다. "어렸을 때부터 고기 잡는 법을 배운 셈이죠. 대학생 때도 가구점에서 판매원, 계산원, 디자이너 역할을 했죠." 가구점은 4곳으로 확장했고 백화점을 나와 5만 스퀘어피트의 대형 가구점으로 독립했다. 임씨가 가주로 눈을 돌리 건 10여 년 전이다. 가구나 건축 관련 일을 하다 보니 대부분의 물류가 중국에서 출발해 가주를 거쳐 유통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임씨는 가주에서 자리를 잡으면 크게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다. "가주로 올 때 텍사스 친구들이 미쳤다고 했어요. 잘 나가던 사람도 가주에 가면 망하는 일이 많다고요. 저는 어쩌면 그게 기회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교만이었죠." 시장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인테리어 회사를 차렸지만 수익이 신통치 않아 고전했다. 어려울 때 포착한 기회가 부동산 중개업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계약서를 쓰는 것에 익숙했고 무엇보다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 한 달여 만에 부동산 중개사 자격증을 따 일을 시작했다. "가주로 오기 전 텍사스에서도 3년 정도 부동산 중개일을 했었어요. 가구일을 하다 보면 건축일도 알아야 하고 부동산 쪽도 알아야 했거든요. 그래서 다시 시작했죠." 차별화부터 시도했다. 가구점을 하며 익힌 인테리어 감각과 건축업계 인맥을 살렸다. 부동산 매물을 있는 그대로 거래하지 않고 집을 모델 하우스처럼 꾸며서 팔았다. 이른바 '홈스테이징(home staging)'이다. 7년 전만 해도 색다른 시도였다. "당시만 해도 한국 사람들은 미국 사람들과 달리 집을 예쁘게 꾸미는데 서툴렀죠. 제가 집을 꾸며 놓고 매물 팻말만 꽂으면 며칠 지나지 않아 팔렸죠." 전국부동산 중개인협회(NAR)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중개인 한 명당 12건의 계약을 성공시켰다. 경력 16년 이상이 평균 15건 거래해 중간 소득 약 7만 8500달러를 기록했다. 2년 미만 초보 중개인은 중간소득 8930달러에 그쳤다. 그녀는 업계에서 '해결사'라는 별명으로 통한다. 잘 풀리지 않는 매물도 끈기 있게 달라붙어 계약을 성사시키곤 한다. 한번은 그녀가 신은 '하이힐' 덕분에 계약이 이뤄졌다. 집 구매자와 함께 집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하이힐에 부딪히는 바닥 소리가 이상했다. 외관상 볼 수 없었던 바닥재 접착 불량을 찾아낸 것이다. 상대방과 추가 협상을 해 좀 더 나은 조건에 손님이 집을 살 수 있도록 도왔다. "역설적이지만 저는 집이 필요한 사람에게 싸게 살 수 있도록 돕고 판매하는 사람에게는 최대한 많은 이득을 얻도록 중개합니다.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 모두 만족시키는 것은 어렵지만 제가 해야할 일이죠." 여성 중개인으로서 겪는 어려움도 있다. 성별 가리지 않고 손님과 적극적으로 대화를 해야 하다 보니 외모나 말투를 두고 오해를 사는 경우다. "가령 여시(여우)같이 하고 다닌다는지 살이 쪘다든지 외모에 대해 아무렇게 나 말하는 경우가 있어요. 대부분 웃어 넘기지만 때로는 가슴이 아플 때가 있죠." 부동산 업계에서는 3년이 고비고 5년을 버티면 길게 갈 수 있다고 말한다. 임씨는 "부업으로 부동산 중개업을 시작할 거라면 시작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처음 시작하면 지속적인 수입이 없어 힘들어 하죠. 그러다 한두 건 하면 꽤 큰돈을 법니다. 도박과도 같죠. 올인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부동산 중개인이 되려면 18세 이상으로 중대한 범죄 기록이 없다면 누구나 도전할 수 있다. 라이선스 시험을 치기 위해서는 부동산국이 허가한 부동산 학교에서 일정 시간 이상의 수업을 받아야 한다. 가주 교육과정은 135시간이다. 통상 10~13주 과정이다. 대학에서 부동산을 전공했다면 곧바로 시험을 칠 수 있다. 비용은 부동산 학교마다 다르다. 보통 400~500달러 정도다. 인터넷 수업을 들을 경우 100달러다. 시험은 부동산 개론과 부동산 실무 등 2개 필수 과목과 부동산 법률, 부동산 감정, 파이낸스 등 1개의 선택 과목으로 이뤄져 있다. 객관식 150문제 중 70%인 105점 이상을 받으면 합격이다. 시험은 모두 영어다. 합격률은 80% 이상이다. 부동산 중개인(Sales Person) 자격증을 따면 회사에 소속돼 업무를 시작할 수 있다. 2년 정도 경력을 쌓으면 브로커 자격증 시험을 칠 수 있다. 커미션은 전체 부동산 가격의 약 6%다. 부동산 거래가 이뤄지려면 보통 부동산 판매회사와 판매 대리인, 부동산 구매회사와 구매 대리인 등 4곳이 개입해 커미션을 1.5%씩 나눠 가진다. 배원홍 부동산자산관리사(CPM)는 “자격증을 따도 서류를 작성하는 법 등 3~6개월 이상의 실무 교육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황상호 기자 hwang.sangho@koreadaily.com

2017-08-22

'네일을 향해' 손톱에 꽃을 그렸다

2002년 맞선보러 온 뉴욕서 퇴짜맞았지만 '신세계' 경험 "아직 젊다" 손톱 미용 도전 LA서 10주 과정 학원 등록 손톱에 직접 그림그려 히트 '10년 셋방살이'끝에 성공 "손톱 다듬 듯 마음도 꾸며" '네일 선교단' 통해 자원봉사 "언니 나 속상해 죽겠어." "왜 왜 무슨 일 있어?" 시댁에서 핀잔을 들은 단골손님이 투정을 부린다. 매니큐어리스트 박성자(44)씨는 손님에게 귀를 열어두고 시선은 손님의 손가락에 고정했다. 손톱이 상하지 않도록 가장자리를 자르고 가운데를 손질한다. 줄의 일종인 네일 파일로 손톱을 긁는다. 손톱 성분인 케라틴이 먼지가 돼 포르르 날린다. "아니 시어머니가…. 남편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것까지 나 때문이라잖아. 말이 돼?" 반응이 중요하다. 조언이라고 지나치게 개입했다간 화살이 성자씨에게 돌아온다. "그랬구나. 어쩌면 좋니." 성자씨는 손님의 말을 들으며 미용 니퍼로 각질인 큐티클을 섬세하게 오려낸다. 자칫 살이 찢어져 피가 날 수 있다. 손님 마음에도 생채기가 남지 않도록 말을 가려 한다. 때로는 수술방 의사처럼 때로는 타로카드를 보는 점쟁이처럼 몸과 마음을 함께 '큐어'해야 한다. 13년차 매니큐어리스트 박성자씨는 10년 동안 한인타운 한 미용실내 작은 공간을 빌려 네일샵을 운영하다 3년 전 독립했다. 350스퀘어피트의 아담한 가게를 얻어 탁자 두 개를 놓고 직원 2명과 일하고 있다. 4가와 웨스턴의 '웨스턴 병원'몰에 있는 네일샵 '봉숭아'다. 올해 초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불법 체류자 단속 때문에 손님수가 줄어 힘들었지만 다행히 요즘 다시 회복세다. 박씨는 거의 예약 손님만 받는다. "2005년 2006년이 가장 활황이었죠. 직원들 월급 다 주고도 한 달에 1만 달러는 벌었으니까요." 그는 서울 월계동에서 자랐다. 어릴 때부터 놀이터에서 아이들 머리를 땋아주며 '꼬마 미용사' 노릇을 했다. 처음 매니큐어를 만진 건 고등학교 때다. 한 집에 살던 사촌언니의 화장품이 너무 예뻐 손을 댔고 꾸중을 들었다. "어릴 때부터 미용에 관심이 많았어요. 친구들에게 손톱을 칠해주면 친구들이 '네일샵보다 더 잘한다'고 했어요. 손재주가 남달랐죠." 미국에는 2002년에 처음 왔다. 경남 밀양에서 옷가게를 하다 접고 서른 살에 선을 보러 뉴욕으로 왔다. 하지만 남자쪽 어른들은 "시민권 따기 위해 온 것 아니냐"면서 퇴짜를 놨다. 맞선은 틀어졌지만 헛걸음만은 아니었다. 미국은 신세계였다. 모든 것이 세련돼 보였다. 맨해튼에는 한 블록내 한인 네일샵이 서너 군데 이상일 정도로 성황이었다. "한국에선 여자 나이 서른에 시집을 안 가면 뭔가 모자란 사람 취급을 받았어요. 그런데 미국은 아니었어요. 다들 자유로워 보였고 내가 아직 젊다는 것도 깨닫게 됐죠." 2005년 여행비자를 받아 외삼촌이 사는 LA로 왔다. '네일을 하면 굶어 죽지 않는다'는 주변 조언을 듣고 미용학원에 등록해 자격증 공부를 했다. 2개월 반 과정의 학원비는 2500달러였다. 특히 필기시험이 어려웠다. 영문으로 중학교 수준의 생물 화학 병리학에 해부학까지 공부해야 했다. 요즘은 한국어 객관식 필기시험이 있지만 당시에는 영어로 시험을 쳐야 했다. "당시 동부에서는 한인 네일샵들이 대단했어요. 돈을 잘 벌어 '네일 재벌'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죠." 그녀는 학원 과정을 수료하기도 전에 미용실 네일샵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했다. 오전에 공부하고 오후 1시부터 9시까지 손톱을 만졌다. 한 달 받는 월급은 1500달러. 팁까지 합하면 2200달러였다. 모두 현금이었다. 월급은 많지 않았지만 그녀의 '작품'은 히트를 쳤다. 보통 다른 매니큐어리스트들은 손톱에 색을 배열하고 인조 손톱을 붙이는 수준이었지만 성자씨는 손톱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다. 장미꽃과 데이지꽃 토끼와 당근 등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캐릭터를 만들었다. 한인타운에서는 첫 시도였다. "당시만 해도 저처럼 직접 디자인한 사람은 드물었어요.입소문이 퍼지면서 서로 해달라고 찾아왔죠. " 일반적으로 매니큐어가 10~15달러라면 성자씨는 꽃 한 개당 5달러씩 웃돈을 받았다. 모조 보석을 붙이면 개당 1달러 추가. 팁까지 더해 손님 1명당 100달러를 받았다. 벌이가 좋아졌고 그참에 일하던 미용실 안 네일 가게를 인수했다. 직원도 두세 명 채용했다. 일이 많아지면서 몸은 힘들어졌다. 구부정하게 앉아 일하다보니 목과 허리 등 관절병을 피할 수 없다. 또 아세톤이나 알코올 등 화약약품을 많이 사용하다보니 피부 질환도 생긴다. "자다가 팔목이 잘려나갈 듯 아파서 잠에 깬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운동선수들이 쓰는 진통제를 맞고 일한 적도 있어요." 이른바 '진상 손님' 때문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손이 느리다며 갑자기 화를 내는 손님이 있었고 손님 발뒤꿈치의 각질을 제거하려 약품을 발랐다가 피부 질환이 생겼다고 폭언을 듣기도 했다. 어떤 손님은 "내가 미대를 나왔어!"라며 손톱에 그림을 그리던 성자씨의 붓을 뺏는 일도 있었다. 매니큐어리스트는 게으를 수 없다. 유행은 금방 변한다. 최근에는 말린 꽃이나 천 조각 머리핀도 네일 재료로 쓴다. 모조 보석은 기본이다. 성자씨가 작업 테이블 서랍을 열어 한국과 일본에서 공수한 장신구를 보여줬다. "지금도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을 보며 기술을 배우고 있어요. 요즘 손님들은 사진을 가지고 와서 그대로 해달라고 해요. 그때 재료가 없으면 곧 인기가 사라지죠." 얼마 전에는 '네일선교단'을 꾸렸다. 3년 전 다니던 교회에서 개최한 장애인 페스티벌에 참가했다가 감명을 받았다. "200~300명이 줄서서 기다렸어요. 자폐아를 키우는 어머니의 손에 빨간색 매니큐어를 칠해줬는데 너무 기뻐했죠." 지난해는 물도 나오지 않은 멕시코 산동네에 가서 검은 때가 낀 아이들 손톱에 다양한 캐릭터와 그림을 그려줬다. "새로운 꿈이 생겼어요. 소외되고 어려운 나라에 선교가서 손톱을 다듬 듯 사람들 마음을 꾸며주고 싶어요." 매니큐어리스트가 되려면 주 정부가 인증한 학원이나 기관에서 400시간의 이론 실습 교육을 마쳐야 한다. 학과목에는 질병 위생 수업뿐만 아니라 생물 화학 수업이 포함돼 있다. 4년 전 한국어 필기시험이 생겼다. 240시간을 채우면 주립 미용 라이선스 기관인 NIC(national interstate cosmetology)를 통해 시험을 미리 신청할 수 있다. 보통 3개월 정도 기다려야 한다. 필기시험은 객관식 100문제다. 100점 만점에 70점 이상이 합격이다. 실기시험은 300점 만점이다. 필기와 실기시험 전체 400점 만점에서 300점 이상 받아야 한다. 산타모니카나 세리토스 등 코스메틱 칼리지가 있는 로컬 대학을 나와도 매니큐어리스트가 될 수 있다. 대신 학기를 수료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한국에서 미용학교를 졸업하거나 네일 일을 한 경력도 미국에서 인정된다. 다만 자격증 평가기관에 학교나 기관 일한 직장의 월급 내역 등 다양한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까다로운 작업이다. 또 주 정부 시험도 통과해야 한다. 온라인으로 2시간 정도 인증 교육을 받으면 부업으로 눈썹 문신 등 영구 화장도 할 수 있다. 노동통계국에 따르면 2015년 기준 미 전체 매디큐어리스트 수는 8만3840명이다. 재미한인미용협회는 한인타운 내 네일샵이 100곳 정도 있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황상호 기자 hwang.sangho@koreadaily.com hwang.sangho@koreadaily.com

2017-08-09

하늘 위 '짐끄는 개' 마침내 날다

5000피트 상공서 동행 인터뷰 항공대 낙방후 비행학교 공부 20년전 착륙사고에도 포기안해 '월급 2400달러' 화물기 조종 비행 13년만에 주류항공사 입사 “남들 가지 않은 길 도전하길” “두두두두두.” 프로펠러가 바람을 일으키며 몸을 푼다. 두려움 한 바퀴, 기대감 한 바퀴. 20대 훈련생이 조종간을 잡았다. 모든 점검을 마치고 관제탑에 보고했다. “체로키 6985C, 이륙 준비됐습니다(Cherokee 6985 Charlie, we are ready for take off).” “치노 관제탑이다. 이륙하라(Chino Tower, We are clear for take off).” 기자가 동승한 경비행기는 곧 활주로를 박차고 날아오른다. 시속 100마일, 프로펠러 진동이 동체를 뒤흔든다. 파도를 타는 듯 몇 번의 출렁임 끝에 비행기는 안정을 찾았다. 화씨 100도의 데워진 지표면 위에 깔린 옅은 스모그가 발 아래 산맥을 가렸다. “오늘 훈련은 계기훈련 비행이에요. 되도록 전방을 직접 보시지 말고 계기판 침에 의지한 채 비행해 봅시다.” 부조종석에 앉은 교관 김백평(영어명 베니ㆍ43)씨가 훈련생에게 가르쳐야 할 과제는 계기판 읽기 훈련이다. 시야를 확보하기 어려운 악천후를 대비한 교육으로 훈련생의 시야를 모자챙으로 일부 가린 뒤 속도계와 고도계, 수평계 등 십여 개의 계기판에 의지해 조종하도록 지도해야 한다. 이륙 후 바짝 긴장한 건 뒷좌석에 동승한 기자뿐이다. 훈련생과 교관은 마치 프리웨이를 달리듯 여유롭다. 교관은 전체적인 운항 방향을 훈련생에게 제시하고 중간에 빠진 절차나 조작 실수에 대해 꼼꼼히 가르친다. ‘직업탐사’ 두 번째 주인공은 주류 대형 항공사 A항공의 기장 김씨다. 그는 운항이 없을 때면 비행학교에서 후배를 양성하고 있다. 그가 모는 경비행기에 탑승해 지상 5000피트 위 상공에서 인터뷰했다. 김씨의 집은 LA 동부의 다이아몬드바에 있다. 그는 비행이 있는 날이면 지사가 있는 미 중부인 캔자스시티로 출근한다. 교통편은 비행기다. 승무원들은 회사 ID를 제출하면 어느 공항에서나 어느 항공사 비행기든 무료로 타고 목적지로 갈 수 있다. 한 차례 비행 여정은 보통 3박 4일이다. 가령 캔자스시티에서 뉴욕에 들렀다가 다시 텍사스로 가서 하루를 묵고 다시 여러 도시를 경유해 캔자스시티로 복귀한다. “근무 일정상 조종사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요. 때론 외롭기도 하죠. 아이들이 한창 크는데 가족과 멀리 떨어져 가족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면 많이 아쉽죠.” 조종사로서 즐거움 중 하나는 고요한 상공에서 기막힌 풍광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카리브 해의 지는 석양이나 구름 속에서 요동치는 천둥 번개, 또 그 위에 함께 뜬 달과 별을 보고 있노라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그림 같은 풍광 때문에 조종사였던 생텍쥐페리가 (소설) 야간비행을 썼는지도 몰라요.” 가장 큰 보람은 승객들이다. 공항 출구에서 부모를 만나 울음 터트리는 군인, 서류 가방을 들고 자신감 있게 거래처 사람을 만나는 샐러리맨을 보고 있으면 뿌듯하다. “공항은 저마다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대표적인 곳이잖아요. 가족여행이 됐든 친구를 만나든, 무사히 기다리는 사람 옆으로 데려다줬다는 게 기장으로 가장 큰 보람이죠.” 기장이 되는 과정은 험난했다. 1989년 중학생 때 가족 이민온 그는 조종사를 꿈꿨지만 항공 전문 대학에 진학하지 못해 좌절하기도 했다. 뒤늦게 비행학교에서 자격증을 딸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1993년부터 낮에는 전자회사, 퇴근 후에는 비행 학교에서 공부했다. 당시 실습비는 교관비를 포함해 시간당 200달러였다.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1996년 친구를 태우고 연습 비행을 하다 착륙 도중 실수로 활주로를 벗어나 바위를 들이받는 사고를 내 지역 일간지에 실리기도 했다. “수입의 거의 대부분을 연습비에만 썼어요. 그때는 연습밖엔 몰랐죠.” 비행 자격증을 딴 뒤 2년간 교관 생활을 마치고 운송회사에 입사했다. 탑승객 15명을 태우는 경비행기인 일명 ‘프레잇독(Freight Dog)’을 몰았다. 구식 기종에 업무량이 많아 ‘짐 끄는 쓰레기’로 불릴 정도로 조종사들에게 악명이 높다. 악천후를 만나면 교신이 끊기거나 잡음이 들리기 일쑤였고 날씨가 추워지면 기체가 얼어 추락 위험이 컸다. 날씨가 좋지 않아 운항이 어려울 때도 회사는 매출 때문에 은근히 운항을 하도록 했다. 매일 새벽 4시 반쯤 일어나 물류회사가 있는 버뱅크로 출근해 오후 7시가 돼서야 퇴근했다. 3년간 월급 2400달러만 받고 근무했다. “프레잇독은 웬만한 ‘깡’ 없이는 운항 못해요. 한인 조종사가 졸다가 추락사 한 적도 있어요.민간 항공사 기장들도 프레잇독 출신이라고 하면 한 수 접어줍니다.” 쥐꼬리 만한 월급에 위험한 비행을 하던 그가 마침내 꿈을 이룬 것은 11년 전이다. 주류 대형 항공사로 이직 기회를 잡았다. 원서를 쓰고 떨어지기를 반복하다 포기할 때쯤이었다. 3년 전에는 기장이 됐다. 항공업계는 백인이 주도한다. 김씨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주류 항공사 취직은 아시안에게는 좀 더 엄격한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일단 입사 후는 철저한 연공서열이다. 결격 사유가 없다면 입사한 날짜에 의해 철저히 승진한다. 다만 정기적으로 운항 평가와 비상 훈련 평가를 받는다. 또 당뇨나 심장질환이 없는지 6개월 마다 신체검사를 해야한다. 5년차 파일럿의 연봉이 보통 10만 달러에서 12만 달러, 15년차 기장은 보통 25만 달러에서 40만 달러라고 한다. 그는 연방항공국(FAA) 시험관이 되는 것이 꿈이다. 아직 한인들이 거의 진출하지 못한 분야이다. 또 라번시에서 본인이 직접 운영하고 있는 재미한인항공학교(KAAA)와 치노시에 있는 한서대학교 위탁운영 비행학교 M.I.AIR에서 계속 후배들을 가르칠 계획이다. “저는 전형적인 X세대였어요. 꿈만 좇아서 앞으로 왔죠. 한인들도 ‘꿈의 직업’을 선택했으면 좋겠어요. 남이 가지 않는 곳을 가는 것도 나쁘지 않거든요.” ----------------------------------------------------------------------------------------------------------------------- 파일럿 어떻게 되나 민간 항공기 기장이 되기 위해서는 수만 달러의 학비를 들여 라이선스를 취득해야 하고 이후 평균 3000시간의 비행 경력을 쌓아야 한다. 메이저 항공사의 조종사가 되기까지 10여년이 소요되기도 한다. 파일럿 라이선스는 비행기 종류와 의무 비행시간에 따라 크게 4개 종류로 나뉜다. 학생 파일럿 자가비행기 조종사 상업용 항공기 파일럿 및 교관 민간 항공기 파일럿(ATP) 등이다. 통상 자가비행기부터 시작해 비행시간을 쌓아 단계별로 취득한다. 따라서 ATP 라이선스 취득 요건이 가장 엄격하고 보수도 가장 높다. 비행학교에서 라이선스를 취득한 뒤 가장 필요한 것은 비행시간 경력을 쌓는 일이다. 가장 선호하는 방법중 하나가 비행학교 교관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필요한 비행시간을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규모 지역항공사 파일럿의 평균 연봉은 2만~4만 달러에 불과하지만 메이저 항공사의 대형 항공기장의 경우 12만1408달러다. 황상호 기자 hwang.sangho@koreadaily.com hwang.sangho@koreadaily.com

2017-07-17

이민 온 '기러기 아빠' 화물차로 일어서다

한국 사업 어려워 미국행 닥치는 대로 육체노동하다 채용 광고보고 트러커 지원 3년 차 임금 마일당 40센트 식사·생리현상 차에서 해결 "힘들지만 일상의 행복 감사" 아침 8시. 석승환씨는 2007년형 낡은 캠리를 타고 40분 거리에 있는 콜턴시의 한 화물회사에 출근한다. 그가 운행해야 할 화물차는 길이 53피트, 높이 13.6피트의 대형 화물차 '데이캡(Day Cap)'이다. 승용차 4대와 맞먹는 길이다. 석씨는 운행 전 차량 엔진룸을 열어 냉각수가 충분한지 오일은 새고 있지 않은지 꼼꼼히 점검한다. 작은 고장이라도 무시했다간 덩치 큰 화물차는 한순간에 대형 사고를 낼 수 있다. "저만 모는 차가 아니거든요. 운전 습관이 다른 기사들도 함께 타기 때문에 바퀴 마모 상태 등 세세히 점검해야 해요." 석씨는 문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 2미터 높이의 운전석에 뛰어오르듯 올랐다. 조수석에 기자도 함께 탔다. 실내 공간은 의외로 어른 한 명이 겨우 누울 수 있을 정도로 좁다. 석씨는 운행 데이터가 기록되는 내비게이션 크기의 컴퓨터를 켜고 시동을 걸었다. 개스(가속 페달)를 밟자 480마력의 엔진이 굉음을 뿜어내며 출발한다. 널따란 도로가 골목길 마냥 좁아 든 기분이다. "오늘 목적지는 샌디에이고 북쪽도시 '샌티'입니다. 리버사이드 월마트에 들러 화물이 실린 트레일러를 연결해서 샌티에 있는 월마트로 가야합니다." 달리는 차창 너머로 양털을 깎아 놓은 듯 키 작은 덤불이 산맥을 따라 듬성듬성 나 있고 한적한 말 농장이 펼쳐진다. 그는 특히 바닷가 도로나 포도밭 같은 자연 풍경을 좋아한다. "주말에 교통 체증 없는 도로를 달리다 보면 스트레스가 풀려요. 시골길을 달릴 때는 마치 여행 떠난 것처럼 설레기도 해요." 석씨는 서울에서 건축업과 인터넷 사업을 하며 미국에 먼저 간 아내와 아들에게 생활비를 보내던 '기러기 아빠'였다. 그러다 한국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6년 전 가족이 있는 미국으로 건너왔다. 하지만 미국에 생활터전으로 마련했던 비디오 대여점마저 적자가 계속됐고, 집 렌트비를 못내 강제 퇴거 명령을 받았다.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어요. 골프장에서 공을 줍기도 하고 택시 운전에 수학과외 교사를 하기도 했어요. 한국 생활 거품이 빠지는데 몇 년 걸리더라고요." 그러다 3년 전 우연히 인터넷에 올려진 화물차 운전기사 채용 공고를 접했다. 경험이 없어도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기에 지원했다. 화물 운송회사에 입사해 2주간 무료 교육을 받고 '상업운전면허증(CDL)'을 땄다. 무료 교육의 대가로 9주 동안 최저임금만 받고 일을 해야 했다. 그때 몸무게가 20파운드 빠졌다고 한다. "초보 트러커는 일이 익숙해질 때까지 상급자와 동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 운행은 조수들이 다 해요. 체력 소모가 큰데다 운전중 조금만 실수하면 상급자가 꾸짖고…. 스트레스도 심했어요." 트럭 기사는 취직하기 어렵지는 않다. 미국트럭운송협회에 따르면 연간 부족한 화물 운전기사수는 3만5000명~4만 명에 달한다. 장기간 운전대를 잡아야 하고 가족과 보낼 시간도 적다 보니 기피 업종이 된 것이다. 회사에 소속된 석씨의 임금은 마일당 40센트다. 대형 화물차를 소유한 운전자의 경우 마일당 1달러다. 대신 기름값과 보험료 등 기타비용은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장거리 트러커들에게 가장 곤란한 문제는 생리현상이라고 한다. 휴게소에 들르면 된다고들 생각지만 속 모르는 소리다. 숙련된 기사가 아니라면 덩치 큰 화물차를 후진 주차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조금만 실수해도 다른 차량이나 시설물을 들이받을 수 있다. "차라리 음료수를 최대한 마시지 않기로 했죠. 그래도 급할 때는 차를 갓길에 세우고 차바퀴 안쪽으로 들어가 대충 해결해요." 밥도 운전 중에 먹는다. 트러커에게 시간은 돈이다. 석씨는 과자나 바나나 등 간식거리를 머리 위 선반이나 조수석 등 손이 닿는 곳에 두고 먹는다. 허기만 때우다 보니 늦은 시간 귀가해 과식하는 버릇이 생겼다. 석씨 인생 이야기를 들으면서 3시간 만에 목적지 샌티에 도착했다. 매장 뒤쪽 물류창고에 화물차를 붙이고 화물을 내릴 준비를 하는데 석씨의 표정이 좋지 않다. 매장 직원들이 느긋하게 걸어온다. "마트 직원들은 일당을 받지만 저는 시간이 돈이거든요. 빨리 끝내고 또 배달을 가야하니까요." 애가 탄 석씨는 내려서 물건 내리는 일을 돕는다. 그 성실함 덕택에 석씨는 회사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 트러커들이 선호하는 코스에 배정됐다. 배달을 마치고 오후 5시 녹초가 된 몸으로 회사로 돌아왔지만 2건의 추가 배송 업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8시간 남짓 운전해 번 돈은 약 300달러 정도다. 일이 고된 만큼 퇴근은 기다려진다. 아내와 한국 TV 프로그램을 함께 보며 맥주 한 잔 마시는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일상의 행복이다. 아들도 대학을 졸업해 IT기업에 입사했다. "경제적으로 바닥을 쳤는데 화물차 운전이 저를 일으켜 세워줬어요. 고맙죠." 최근 석씨는 또 다른 비상을 꿈꾼다. '장거리 인생 목적지'로 가기 위한 보험 전문가 라이선스를 취득했다. 트러커를 하면서 틈틈이 보험일도 병행하려 한다. "인생 2막을 준비 중인 한인들이 있다면 나이나 경험 때문에 위축되지 말고 무슨 일이든지 도전했으면 좋겠어요. 기회는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찾아온다고 하잖아요." 트러커가 되려면 가장 먼저 상업운전면허증인 CDL(Commercial Driving License)이 필요하다. CDL은 각 지역 전문 운전학교에서 3000~4000달러를 내면 배울 수 있다. 면허 취득까지는 4~10주 정도 걸린다. 석씨처럼 대형 트럭 운송회사에 입사해 위탁교육을 통해 면허를 딸 수도 있다. 시험은 필기와 인스펙션, 주행으로 나뉜다. 모두 영어로 봐야한다. 특히 인스펙션은 시험관에게 차량 정비 방법 등을 영어로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한인들에게 난관이다. 하지만 운전학원에서 가르쳐준 범위 내에서 시험이 치러지기 때문에 수업만 잘 따라가면 어렵지 않다. CDL 시험 자격은 최소 21세, 고졸 이상 학력이 필요하다. 마약류 테스트와 신원조회도 거친다. 급여는 운전자의 운전경력과 근무시간, 화물차 소유 여부에 따라 다르다. 미국트럭운송협회에 따르면 평균 연봉은 약 4만 달러 수준이다. 5년에서 7년 정도 일할 경우 평균적으로 연간 5만5000달러를 받는다. 화학약품 등 위험 물질 운반하면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다. 운행 장소가 일정하고 상여금 등 처우조건이 좋아 트럭기사들에게 '꿈의 직장'인 월마트에 취직하면 평균 연봉은 7만3000달러다. 상세한 내용은 차량등록국(DMV) 홈페이지나 베테랑 트럭 운전사가 운영하는 '트러킹트루스(truckingtruth.com)' 홈페이지에서 찾을 수 있다. 글·사진=황상호 기자

2017-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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